무심코 열고 버리는 병뚜껑. 작은 플라스틱 조각이지만, 모으다 보니 100개가 금방 쌓였다. 그 순간, 이걸 그냥 버리기보단 시각적인 무언가로 바꿔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무드보드’ 실험. 병뚜껑이 내 방 벽에 새로운 감각을 더해줬다.
100개의 병뚜껑, 색깔별로 정리하는 순간의 쾌감
처음엔 무작위로 쌓아두었던 병뚜껑이었지만, 작업을 시작하려니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정리’였다. 브랜드마다 미세하게 다른 크기, 높이, 재질.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건 색상의 다양성이었다. 빨강, 파랑, 초록, 하늘색, 흰색, 투명, 그리고 드물게 금색이나 검정까지. 평소엔 눈여겨보지 않았던 병뚜껑들이 모여 있으니, 마치 컬러칩처럼 느껴졌다.
이들을 색상군으로 나누고, 톤이 비슷한 것끼리 정리하는 과정은 의외로 몰입감을 줬다. 빨강이라 해도 코카콜라 레드와 스포츠음료의 붉은 색은 전혀 달랐다. 파란색도 바다처럼 깊은 네이비부터 스카이블루까지 스펙트럼이 넓었다. 마치 색으로 된 사람처럼, 각 병뚜껑도 제각각 개성이 있었다.
정리하면서 머릿속엔 자연스럽게 무드보드의 콘셉트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병뚜껑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색상 흐름을 따라 이야기처럼 배치해보자는 아이디어가 생긴 것이다. 정렬된 병뚜껑 100개가 테이블 위에 놓인 순간, 나는 이미 이 프로젝트의 첫 성공을 느꼈다.
배치와 접착 – 벽에 걸린 감각의 지도 만들기
정리된 병뚜껑을 무드보드로 완성하기 위한 두 번째 단계는 배치와 고정이었다. 기본 베이스는 폼보드 한 장. 가볍고 튼튼해서 벽에 걸기에도 부담이 없고, 병뚜껑을 단단히 붙이기에도 좋았다. 접착제는 글루건을 사용했는데, 단단히 고정되고 마무리도 깔끔했다.
배치는 ‘컬러 그라데이션’을 중심으로 진행했다. 왼쪽 상단부터 밝은 색을 시작으로, 오른쪽 하단으로 갈수록 짙은 색이 모이도록 배열했다. 색상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구조는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었고, 색을 따라 시선이 이동하는 구조는 마치 물결처럼 부드럽게 느껴졌다.
중간중간 동일한 색상이 몰리는 부분은 피하고, 대각선 방향으로 포인트 색을 배치함으로써 지루함을 덜었다. 그리고 한 가지 실험을 더했다. 몇몇 병뚜껑 위에 작은 글귀나 심볼 스티커를 붙여 의미를 부여하는 포인트를 만들었다. 예를 들어, 빨간 병뚜껑에는 "Start", 초록 병뚜껑에는 "Grow", 파란 병뚜껑에는 "Flow" 같은 단어를 붙여 무드보드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감정의 지도처럼 느껴지도록 했다.
완성된 판넬을 벽에 걸었을 때, 예상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작품이 탄생했다. 플라스틱이라는 인공적인 재료로 만들었음에도, 그 안에는 자연스럽고 감성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단순한 재활용을 넘어선 감각 훈련의 시간
이 무드보드는 단순히 폐플라스틱을 활용한 인테리어 소품이 아니었다. 색을 보는 감각, 조화를 읽는 안목, 손으로 배치하며 얻는 집중력 등 여러 감각을 깨우는 경험이었다. 무언가를 '보는 법'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평소 같으면 스쳐 지나갈 사소한 병뚜껑 하나가, 색으로 분류되고, 위치가 고민되며, 하나의 자리를 찾게 되는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의 회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또한, 이 프로젝트는 ‘재료는 주변에 항상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다. 특별한 재료를 사지 않고도, 늘 마주하던 쓰레기 속에서도 충분히 창작이 가능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작업을 통해 손의 감각과 눈의 직감을 다시 연결하고, 조용히 나만의 리듬을 찾게 되는 과정은 힐링에 가까웠다.
병뚜껑 하나하나를 붙이면서 들었던 생각들, 손끝에서 쌓여가던 색상의 조화, 완성 후 느껴지는 뿌듯함. 모두 ‘작고 사소한 것’이 사실은 꽤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무드보드를 만들었지만, 무드 자체를 바꾼 건 내 하루와 감정이었다.
100개의 병뚜껑이 만든 무드보드는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고, 나의 시선을 다시 훈련시켰다. 작은 것들을 모으고 배열하는 행위는 생각보다 크고 깊은 만족을 준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도, 보기 시작하면 충분히 의미로 바뀔 수 있다.